며칠 전부터 임시 숙소인 쉐어하우스에서 살고 있다. 8베드룸이라서 엄청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다섯 명 밖에 안 되고, 서로 생활패턴이 달라서 욕실을 공유하는 사람과도(2인 1욕실) 부딪힐 일이 전혀 없고, 결정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나 같은 성격들인지 약간 서로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뭐 나도 짐만 잔뜩 쌓아둔 내 방에 정이 안 가서 밖으로만 돌고 있지만 뭐...


  일요일에는 영어수업에서 사귄 친구랑 영화를 보러 갔다. 그 친구가 다른 친구를 또 불러와서 셋이서 봤는데, 보고 올 때는 원래 만나기로 한 친구만 집으로 가는 방향이 달라서 완전 처음 보는 친구랑 꽤 오래 같이 걸어왔는데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생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보지 않은 정치 이야기를 한 데다 고질적인 낯가림 때문에 너무 버벅거렸다. 난 뉴스도 잘 못 챙겨봐서 김정은이 한국에 도착했다 이전과 이후의 상황도 아직까지 파악을 못 했는데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어째서 나보다도 잘 아는지 모르겠다.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거라는 것도 이 친구에게서 처음 들었다. 영어도 못 하고 정치상황도 잘 모르고 얼마나 멍청하게 보였을까.


  어제는 교수님을 만나러 가려고 면담자료를 준비하다 이 방향이 괜찮은가 싶어서 동기한테 도움을 청했다. 동기에게서 적지 않은 피드백을 받아서 고치긴 했지만 여전히 이거 괜찮은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저께 교수님 과목 기말시험 성적이 나왔는데 꽤나 엉망으로 나왔기에 뭔가라도 하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서 애가 탄다. 본래 내 계획은 면담자료를 준비한다->면담을 요청한다->여름학기 등록 서류에 사인을 해달라고 한다->즐겁게 연구실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는데 기말 성적을 받고 보니 면담에서 사죄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맙소사. 별개로 동기랑 얘기하는 건 즐거웠다. 일요일에 성적을 보고 온통 부정적인 생각을 하다가(이러다 교수님이 프로그램에서 나가라고 하시는 거 아닐까?) 친구랑 무서운 영화를 보고 나와서 아주 약간 나아졌다가 동기랑 얘기하고 나서 부정적인 기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난 내가 엄청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하고 만나서 얘기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이제야 이 일기의 제목이 단수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어제 숙소를 관리하는 오피스에서 이메일이 왔는데, 시 차원에서 상수도 검사? 비슷한 걸 해서 아침 8시 반부터 12시까지 단수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숙소에 아직 정을 못 붙인 것과는 달리 잠은 아주 푹 잘 자고 있어서 매일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잠들어서 중간에 3, 4시쯤 한 번 깼다가(보통 밖에서 누가 화장실에 가는 소리가 들려서) 7시에 알람 소리를 듣고 알람을 끄고 다시 9시, 10시에 일어나고 있는데 단수가 되면 세수를 못 해서 학교도 못 오고 참 큰일이겠다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알람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도시락 싸고 설거지까지 하고 8시 23분에 나왔다. 이렇게 단수되는 날이면 욕실이며 부엌이며 온통 붐빌 거라고 예상했는데 놀랍게도 내가 나갈 때까지 아무도 일어난 기척이 없었다. 심지어 도시락이며, 물컵을 안 들고 나와서 도중에 돌아갔는데도...다들 세수도 안 하고 12시까지 집에서 버틸 생각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 덕에 난 편하게 물 잘 쓰고 왔으니 뭐.


  빨리 이사가고 싶다. 이전 집은 벌써 옛날 집이 되어버린 것 같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청소하러 갈 때마다 텅 빈 것을 보고 울컥했는데 이젠 딱히 슬픈 느낌도 들지 않고 빨리 새 집에 들어가서 짐도 풀고 살림살이도 새로 사고 정착하고 싶다.


덧붙임: 일찍 일어난 덕분에 어버이날이 지나기 전에 부모님께 전화도 드릴 수 있었다. 두 분이 두 딸을 키우느라 바빴을 나이에 나는 혼자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심지어 별것도 아닌 일에 우울할 여유도 있으니 감사하고 죄송해야 한다.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진심으로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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