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에 자택 대피령(stay-at-home order)이 내려지고 어제 처음으로 장을 보러 밖에 나갔다.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원래 다니는 마트에 갈지, 아니면 집 근처에 일요일에 문을 열어서 아마도 사람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마트로 갈지 계속 고민했는데, 결정은 의외로 쉬웠다. 구글 지도에서 안드로이드 유저들의 위치정보를 분석해서 실시간 붐빔 정도를 보여주는 가게들도 있는데, 오후 2시에 확인해 보니 원래 가던 마트가 꽤나 한산하다고 나왔다. 그래서 약 15분 만에 외출 준비를 끝내고 얼른 나갔다 왔다.

 

  참, 그나마 마트에 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마스크가 금요일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보내주겠다고 하셨을 때는 부모님 쓰실 것도 부족한데 어차피 여기서 눈치 보여서 쓰지도 못 한다고 괜히 보내지 마시라고 반대했는데, 막상 부치시고 나서는 마스크가 오기 전까지는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고, 이제 미국에서도 마스크를 권장해서 마스크를 받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버스타러 가는 길에 길 건너편에서 조깅하고 있는 사람들 두 명 외에는 아무도 못 봤는데, 버스에도 나까지 포함해서 승객이 세 명 정도밖에 없어서 충분히 거리를 두고 앉아서 갔다. 마트에 도착해서는 카트를 직원이 직접 소독해서 나눠줘서 좋았다. 안에 들어가서도 어플에 나온 대로 평소보다 훨씬 한산해서 사람들과 부대낄 일이 없었고, 마스크 낀 사람들이 꽤 많아서 눈치 보이지도 않았다. 우유나 육류는 여전히 구매 수량 제한이 있었지만 무지방 우유가 몇 개 없고 볶음용 소고기가 아예 없던 것을 제외하면 사정이 넉넉해 보였다. 2주 전에 갔을 때는 아예 없던 타이레놀도 다시 쌓여 있어서 한 개 사 왔다. 지난주에 제대로 못 봐서 궁금해서 확인했는데 화장실 휴지는 정말 하나도 없었다. 크리넥스 갑 티슈도 있고 키친타월도 적게나마 있는데 정말 화장실 휴지만 없었다(쓰다 보니 키친타월을 사 왔어야 했는데 안 사온 게 생각났다). 통조림은 다시 충분해져서 고등어 통조림이랑 참치 통조림을 하나씩 샀다. 비비고 만두는 어제도 없었는데 이건 2주 전에도 없었고 그 전에도 없을 때가 많아서 잘 모르겠다. 라면도 수라면(미역국 라면) 말고는 한국, 일본 라면 따질 것 없이 하나도 없었고(마루한 라면은 인터내셔널로 분류가 안 돼서 있는지 없는지 확인 못 함), calrose 쌀도 없었다.

 

  집에 오는 버스에는 승객이 나밖에 없었다. 버스에서 내린 다음 집으로 걸어오면서 식당들과 새로 문을 열 마트들을 관찰했다. 식당 중에도 문을 닫은 곳들이 몇 곳 있긴 했지만 간혹 테이크아웃을 해주는 식당들 몇 곳은 영업 중이었다. 항상 사람이 길게 줄을 서 있던 판다익스프레스도 정말 한가해 보여서 충동적으로 사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택대피령이 내려진지도 이제 2주가 다 되어간다. 시카고에 첫 확진자가 나왔던 1월 24일부터 사람 많은 곳을 피하고 위생용품들을 사들이긴 했지만 꽤 오랫동안 서부 해안지역에서만 환자가 늘어나는 추세여서 설마 이렇게까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나마 대구, 경북 지역에 확진자가 급증하던 2월에 이미 큰 충격을 받아서 지금 좀 진정된 건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때문에 내 상황도 상당히 안 좋아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아픈 데 없고 집에만 있어도 되는 것만으로도 운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진짜 환자들과 의료진들은 어떤 감정으로 버티고 있는지도 가늠이 안 된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무너지지 말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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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며칠은 수면 패턴 무너짐+감기 기운 때문에 학교에 일주일에 한두 번 출근하는 정도였는데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장 보러 가는 날 딱 하루밖에 나가는 처지가 되었다. 3월 초까지는 그나마 날씨가 좋은 날도 가끔 있어서 햇볕 아래 커피 마시면서 공부하면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는데, 요즘은 매일같이 흐리고 비가 와서 기분이 고조될 일이 아예 없다. 집에 전화할 때 아니면 하루 종일 이야기 나눌 사람 하나 없고, 밥 하기 귀찮아도 사 올 수도 없고, 운동량은 현저히 부족하고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지만 밖에 나가지 않으면 코로나에 감염될 가능성이 없어진다는 압도적인 장점 때문에 외출하는 것을 포기했다.

 

  장을 보러 가야 하는 토요일에는 좀 부지런히 움직인다. 차가 없어서 장을 보러 가려면 버스를 타고 가야 하다 보니 버스나 마트에 사람이 없을 때를 노리게 된다. 지난 주에는 10시에 갔더니 마트에 사람이 제법 많아서 오늘은 아예 8시에 갔다. 이 시간에도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 게 놀랍기도 했지만 노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었다. 오히려 코로나에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최대한 사람이 적을 법한 시간에 나왔을 어르신들께 본의 아니게 걱정을 하게 한 것 같아 죄송하기도 했다. 내가 사는 도시가 속한 카운티에는 아직 환자가 두 명 밖에 나오지 않아서인지 재고가 평소보다 많이 떨어진 상품들도 있긴 했지만 인터넷 뉴스에서 본 대도시들처럼 사재기 상황이 심각하진 않았다.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파스타, Lysol 소독 스프레이, 감자, 우유 등의 재고가 별로 없었고(지난주에는 크리넥스 휴지는 묶음 할인을 했고 화장실 휴지와 키친타월은 확인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이번 주의 특이사항으로는 타이레놀이 전부 팔려 나갔고(액상 타이레놀이 있어서 이거라도 살까 고민하다 작년에 두통 때문에 처방받은 Naproxen이 집에 있는 것이 생각나서 그냥 안 샀다) 희한하게 Chobani 요거트가 털려있었다. 육류(돼지/소/닭)와 유제품(하프갤런/갤런 우유/계란)은 인당 3개까지만 살 수 있는 수량 제한이 있었는데, 아침이라 그런지 육류는 여전히 상당히 많았고 아몬드, 소이 밀크, 저지방 우유 등은 아직도 많은데 무지방 우유(skim milk)가 가장 많이 떨어져 있었다.

 

  지난 주에 장을 보러 갈 때 이번 주에는 외출을 아예 하지 않을 요량으로 2주 치 식량을 샀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종일 집에만 있다 보니 생각보다 빨리 떨어져서(특히 계란) 하는 수 없이 나왔지만 오랜만에 외출을 하니 좋더라. 집에 도착하니 9시 40분일 정도로 상당히 이른 아침이다 보니 거리에 사람도 없어서 앞으로는 아침에 잠깐이라도 산책을 할까 했지만, 오랜만에 바람 좀 쑀다고 감기 기운이 있는 것을 보면 내 면역력도 그다지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곧 집 근처에 Target 매장이 문을 여는데 코로나 사태 이후에 개점일이 변경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4월 5일에 열린다고 하니 그때까지는 지금 있는 것들을 파먹으면서 버티려고 한다.

 

  학교 커뮤니티에서 얼마 전에 읽은 댓글 중에 엄청나게 공감가던 것이 있었다. "(남에게 코로나를 옮으면) 밖에서는 내가 피해자이지만 집에서는 내가 가해자다" 이런 것이었는데 혼자 사는 나는 집에만 붙어 있으면 일단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Social distancing을 넘어 Self-isolation을 하고 있어 점점 더 괴롭긴 하지만 생각을 바꿔서 이 시간을 잘 활용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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