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만 머릿속에 담은 채로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방학을 맞았다. 월요일에는 학교에 갔지만 오늘은 늦게 일어나서 학교 메일함을 확인했다가 오피스가 있는 건물 근처에 수도관이 파열돼서 건물 화장실이 폐쇄될 예정이라는 메일을 보고 핑계김에 연구실에는 가지 않고 근처 마트 가서 간단한 장을 보고 와서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마침 한 달 전에 알라딘에서 주문한 책과 음반이 와 있어서 음반들을 몇 번씩 들어보고 밥 먹고, 설거지하고, 게으름을 피우고는 또 한심하게 하루를 날려버린 것을 자책했다.


  저번 포스팅에도 썼지만 내가 드라마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것을 미국에 와서야 알았다. 일상 회화를 공부하기에 드라마를 보는 것이 좋다고 해서 도전했던 건데, 도저히 1회 이상 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아마존 비디오에 우디 앨런이 감독하고 직접 연기한 짧은 드라마가 있는 것을 발견해서 금요일부터 보기 시작했다. 공부하려고 보는 것이다 보니 일단 재생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결국 조금 전에 끝까지 다 봤다. 전부 다 해서 6회고, 한 편당 24분 정도밖에 안 돼서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써 방학 때 하기로 한 것 중 한 가지는 겨우 발걸음을 뗀 셈이다.


  1회 중반까지 보고 나서야 시대적 배경이 베트남 전쟁 당시라는 것을 알았다. 이념을 떠나서 집안에 침입해 들어온 사람이 쉴새없이 집주인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위험에 빠지게까지 하는 것이 엄청 짜증났다. 게다가 그 집의 또 다른 집 주인은 왜 그렇게 귀가 얇은지......6회에서는 거의 '대학살의 신'을 볼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하게 화났는데 그래도 끝까지 보긴 했다. 마무리는 괜찮다. 무엇보다도 생각이 그렇게 다른데도 상대를 한없이 신뢰하고 응원하는 부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모르는 단어가 A4용지 3페이지 분량이나 나오긴 했지만 발음이 또박또박해서 알아듣기도 편하고 따라서 말하기도 좋았다. 언제쯤이면 자막 없이 즐겁게 드라마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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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네21에서 보고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영화였다.


 포스터는 무슨 'mit 천재들이 카지노를 턴 이야기' 내지는 '세계를 속인 마술사 이야기' 같은 분위기인데, 실상은 kbs 일요스페셜 또는 ebs2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의 영화였다. 차라리 아주 지적인 분위기로 홍보를 했다면 입소문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스페셜이나 다큐멘터리 분위기가 난다는 것은 영화가 재미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카메라의 거친 움직임이나 극 중간에 화면이 멈추고 등장인물들이 배경지식 등을 설명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중간중간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들(예를 들어 아이폰의 발명)도 그런 분위기를 강화했던 것 같다. 금융위기 전후의 일련의 사건들이 너무 극적이어서 최대한 등장인물들의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고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일하게 '아, 이 영화가 극영화이구나'하고 느낄 수 있었던 건 브래드 피트가 등장하는 부분에서였다. 배가 나오고 수염이 덥수룩했지만 극중 이름이 브래드 피트였어도 별로 위화감이 없었을 것 같다. 스티브 카렐이 등장하는 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그못 알아봤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쩐 일인지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객관적 수치만을 믿는 외골수 박사가 '다크나이트' 시리즈의 그 크리스찬 베일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한창 금융공학에 관심이 있던 2010년에 샤이아 라보프가 나오는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를 봤었다. 금융위기 직후에 제작된 영화여서 잔뜩 기대를 했었는데, 오로지 인간의 탐욕! 그리고 그 해결책은 가족주의! 라는 식으로 맺고 끝낸 것이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에 비하면 '빅쇼트'는 금융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비교적 냉엄하게 분석하고 금융시장 전체에 만연한 비합리성과 도덕적 해이를 자세히 그린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금융시장의 붕괴에 베팅한 사람들을 응원하고 있던 내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꼈다는 거다. 금융시장이 붕괴할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들을 비웃는 사람들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웃을 수 있나 두고보자 했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2008년, 2009년의 경제위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주제에 어서 붕괴시점에 도달하기를 바랐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금융시장만 부도덕한 게 아니라 나도 부도덕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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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와 지지난 주에는 집에서 네이버를 통해 영화를 다운받아서 봤다. 졸업하려고 거의 2년 동안 영화를 안 보다시피 하다 보니 영화 보려고 시간 내는 게 귀찮게만 느껴졌는데, 주말마다 한 편씩 보니까 또 재밌다. 이번 주말에는 극장에 가봐야겠다.


1. 소셜포비아(2014)

 연말에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을 때, 말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고등학교 동창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언젠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이고를 떠나서 대사와 사건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의 밑바닥까지 보여주려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건 알겠지만, 너무 거칠고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불편하다는 것은 꼭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만은 아니다.


2. 행복한 사전(2013)

 일본영화 특유의 감성이 싫어서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일본 아카데미상을 휩쓴 작품이라고 해서 봤다. 역시...고통스러웠다. 중간중간 딴짓을 해서 몇몇 대사들은 아예 알아듣지도 못했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정말 아무런 사건도 위기도 없이 시간이 흘러가다 보니, 미야자키 아오이가 이혼을 요구할 거라는 어처구니 없는 기대까지 했었다. 몇 년에 걸쳐 사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한다고 해서 언어로 세상을 빚어내는 과정을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로지 낱말을 수집하고 의미를 수정하는 데서 생겨나는 장인정신에만 집중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무튼 원작도 읽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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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식당 (2015)

Midnight Diner 
7.6
감독
마쓰오카 조지
출연
코바야시 카오루, 오다기리 조, 타카오카 사키, 타베 미카코, 키쿠치 아키코
정보
드라마 | 일본 | 120 분 | 2015-06-18
글쓴이 평점  


 작년 6월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본 이후에 한번도 극장에 가지 않았다. 마침 휴가를 얻어서 시간은 넘쳐나는데 뭘 볼까 하다가 얼마 전에 14권까지 전부 구비하기도 했고 해서 봤다.


 크게 세 개의 에피소드('나폴리탄', '마밥', '카레라이스')로 구성되었고, 드라마에 나오던 배우들이 거의 대부분 등장한다. 드라마 시즌 2에서 오다기리 죠가 식당을 떠났는데 뭘로 등장하는 건지 궁금해서 계속 관찰했는데 설마 얼뜨기 경찰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아마 머리 짧은 모습은 처음 봐서 그랬던 것 같다). 세 에피소드 중 재미를 따지면 1, 2번째가 재미있었고 가장 좋았던 것은 2번째 것이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지만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기적인 행동을 '삶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포장하는 것이 불쾌했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등장한 타베 미카코는 처음에는 정신병자인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귀여워 보였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유골함은 전체를 관통하는 소재였다. 처음에는 단지 미스테리한 물건일 뿐이지만 어느 순간 과거를 놓지 않으려는 몸짓이 되고, 아름다웠던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단순히 보통 사람들의 삶을 피상적으로 관망하기만 하던 드라마나 만화에서와는 다른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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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노바디 (2013)

Mr. Nobody 
7.3
감독
자코 반 도마엘
출연
자레드 레토, 다이앤 크루거, 사라 폴리, 린 당 팜, 리스 이반스
정보
판타지, 로맨스/멜로, SF | 캐나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 138 분 | 2013-10-24
글쓴이 평점  


 3시 반에 수업 끝나고 뭘 할까 생각을 하다가 학교 안에 있는 극장 시간표를 살펴보니 4시 20분에 '블루 재스민'이 있고 7시 20분에 '미스터 노바디'가 있었다. 오래 전부터 '블루 재스민'을 보고 싶어하긴 했지만 '마스터'를 보고 싶은 것처럼 순전히 평이 좋아서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더 공부하다가 '미스터 노바디'를 봤다.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굉장히 밝고 화사하다. 딱 네이버 영화에 나온 줄거리 정도만 알고 가서 세 여자와 관련된 아홉 가지 인생이라는 건 미리 알고 갔는데 분위기나 내용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무척 달랐다. 초반에 SF에나 나올 법한 미래가 배경이라서 이질적으로 느껴졌는데 생각해보니 1975년에 태어난 주인공이 118세가 되었다고 하니 무리도 아니었다. 118세의 주인공 니모가 회상하는 어린 시절의 풍경은 알록달록하고 아름답다. 주인공의 운명의 여자들(?)인 안나, 앨리스, 진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무슨 운명의 세 여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쪼르르 앉아있어서 웃었다.


 아주 사소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인생의 방향이 흔들리고 순간순간의 선택에 의해서 인생 전체가 바뀔 수 있다는 영화의 주제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앞에서 스쳐지나갔던 이미지들이 인생의 중대한 순간에서 다시 등장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게 9살 니모의 상상인지, 15살 니모의 소설인지, 아니면 118살 니모의 회상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고 이 중 어느 것이 진짜 인생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사실 어느 쪽이 진짜든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하다.


 집에 오는 길에 지하철역에서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전화기를 주으면서 이건 어떤 사건의 계기가 될까 생각하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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