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과의 면담은 언제나 피곤하다. 교수님이 성격이 피곤한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교수님과 이야기하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머리를 써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무튼 다섯 시 20분에 면담을 끝내고 나와서 밥 먹기 전까지만 쉬려고 의자에 거의 드러누워있다시피 했는데 어느 틈에 잠들었다. 잠결에 언니한테 인사를 한 기억이 있긴 했는데 깨어 보니 7시 10분이었고 연구실에는 언니도 신입도 없었다. 이게 또 무슨 꼴이야........하고 생각하다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고 나와서 밥을 먹었다.


 논문 쓰느라 바쁘고 책 한 권을 일 주일 넘게 읽고 있는 바람에 아직 열 권 밖에 다 못 읽었다. 그 중 어느 것도 별로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괜찮은 책들이었다.


1. 양철북 2(귄터 그라스) - 초반부까지는 근성으로 읽었는데 패전 이후에는 그렇게 싫기만 하던 오스카에게 어떤 연민? 같은 것이 느껴졌다.


2. 라블레의 아이들(요모타 이누히코)


3. 슈퍼내추럴: 고대의 현자를 찾아서(그레이엄 핸콕) - 두께에 비해 비교적 쉽게 쓰여진 책이다. 순전히 자신들의 권위에 의존 하는 학자들을 일일이 반박하고 일갈하는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4. 사랑이라니, 선영아(김연수) - 알랭 드 보통 책을 읽는 기분이었다.


5.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알레산드로 보파) - 쉽고 얇은 책이라서 하루만에 읽었는데 한 번씩 사냥개 비스코비츠 이야기가 생각나고 그런다.


6. 거장과 마르가리타(미하일 불가코프) - 또 읽어도 역시 좋다. 마르가리타가 하늘로 날아오를 때와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안식을 얻을 때의 느낌이 좋다.


7. 사랑의 단상(롤랑 바르트) - 남자 작가가 썼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내가 롤랑 바르트라는 인물에 무지한 탓도 있을 것이다) 사랑의 순간에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들을 굉장히 섬세하게 그렸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된 텍스트 중 하나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꼭 다시 읽어보고 싶다.


8. 빛의 제국(김영하) -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간첩을 소재로 다룬 영화나 책들 중 가장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9. 위대한 유산 1(찰스 디킨스) - 앞부분의 지루함을 견디고 나니 굉장히 재미있었다.


10. 본성과 양육(매트 리들리) - 문제의 근성작이다. 요즘 버스에서 자주 졸다보니 진도가 잘 안 나간다. 그렇지만 이전에 읽었던 매트 리들리의 다른 책들('이타적 유전자', '붉은 여왕') 못지 않게 재미있고 "양육에 의한 본성의 발현"이라는 주제 자체가 무척 흥미롭다.


11. 정체성(밀란 쿤데라) - '본성과 양육'을 읽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먼저 읽었다. 재미있긴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숙제하다 밤을 새고 새벽에 수영을 갔다와서 지금까지 깨어있다. 점심 먹고 잠깐 자고 수업 전에 또 자긴 했지만 평소 자는 시간인 네다섯 시간에는 못 미친다. 덕분에 하루 종일 떠 있는 것 같았다. 딴 생각도 안 들고 오로지 이 숙제만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자야지ㅜㅜ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너무 바빠서, 또는 피곤해서 연락할 정신도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한다니, 나도 참 갑갑한 녀석이다.


 일기 제목이 '환상'인 이유는 잠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하루 종일 별 일도 없는데 행복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하고 있는 고민들이 모두 해결된 것처럼...그렇다고 일기 제목을 '엑스터시' 같은 걸로 하면 공연한 오해를 받을 것 같아서, 지금의 내 기분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하는 말이지만 환상이라는 말을 써봤다. 또 잘 자고 일어나면 괴로워질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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