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봄 학기가 끝나고 이사를 가게 됐다. 학부 신입생 수가 늘어나면서 지금 살고 있는 대학원생 기숙사가 학부용으로 바뀐다는 통보를 받았다. 원할 경우 다른 곳에 있는 대학원생 기숙사로 이사갈 수 있다고는 하는데, 처음 기숙사를 신청했을 때 그 곳의 싱글 원베드룸이 부족해서 여기로 보내진 것이고, 올해 여름에 그 기숙사 단지 근처를 지나가다 건물들을 철거하는 것을 봐서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기숙사 관리자에게 transfer를 신청하면 확실히 원베드에 배정될 수 있는지, 그리고 혹시나 1, 2년 후에 또 이사를 해야 하는 게 아닌지 물어봤는데 어느 것도 확답을 줄 수 없다고 해서 마음 편히 학교에서 가까운 off-campus housing을 찾기로 했다.


  퇴거 통보를 받은 것이 월요일 오후라서 그 이후로 계속 멘붕한 상태로 집을 알아보고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는 등 부산을 떠느라 제대로 일을 하지 못 했다. 이틀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직접 가서 보지 않는 이상 옮길 방에 관한 어떤 새로운 정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서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상태다. 다음주 월, 화가 가을방학이라 몇 군데 후보군들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연구실과의 거리를 가늠해볼 예정이다.


  동기와는 지난주 화요일인가, 수요일 이후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1) 지금 교수님과의 과제 때문에 동기가 매우 바쁨 2) 동기가 바쁜 와중에 나 혼자 심심해서 잉여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음 3) 동기는 숙제 물어볼 때 외에는 내 연구실로 찾아오는 법이 없어서 서운함 등이다. 사실 바쁜 동기를 배려하기 위한 것보다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다. 학부나 석사 때는 내가 항상 동기의 입장이었는데, 아무리 바빠도 한 사람이라도 말 걸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지금도 내가 동기한테 가서 10분, 20분 떠든다고 연구를 엄청나게 방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아직도 우울한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 해서 집중력이나 공부에 대한 의욕이 많이 떨어진 상태인데 한창 새로운 연구 과제 때문에 의욕과 열정이 불타고 있는 동기랑 얘기하면 괜히 내가 더 초라하게 느껴질 것 같고, 내가 누가 말 걸어주는 것에 기뻤던 것과 달리 이 친구가 연구에만 온 신경이 가 있어서 대화에 집중하지 못 하면 짜증날 것 같아서 가기 싫은 거다.


  동기랑 이야기를 하지 않는 대신 월요일과 오늘은 각각 같은 방 여자 친구들, 그리고 한국인 여자 친구와 이야기를 했다. 아 정말 좋았다. 지난 글에는 내 친구가 동기밖에 없다고 썼었는데, 이 친구들과 대화를 할 기회가 별로 많지 않을 뿐이지 이 친구들도 친구다. 그것도 내가 엄청 좋아하는...아무튼 그렇게 실컷 수다를 떤 덕분에 우울함을 어느 정도 떨쳐내고 오늘은 이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있다. 차차 나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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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제목의 일기이지만 책에 관한 일기는 아니다.


  원래 이 문단은 "솔직히 쓰자면 최근 몇 주간은 최악이다"로 시작할 예정이었고, 그 문장을 지운 이후에는 "신기하게도 집 밖에서 언제든 누구와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영어로 말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영어로 생각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은 아예 떠올리지도 않게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썼던 건데, 막상 글로 써놓고 보니 '그래도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는데,' '무슨 집 밖에서만 단순하게 생각해. 원래 단순했고 집에서도 그렇게 복잡한 생각은 안 하면서'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는 것과 글로 끄집어낸 것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하긴 요즘 논문 수정하면서 고생하고 있는 것도 머리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던 것들을 꺼내는 게 어려운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동기는 교수님을 압박(?)해서 뭔가 연구를 시작했다. 서로 경쟁심을 느끼는 관계가 아니라서(적어도 나는) 꼭 잘됐으면 좋겠지만 그 와중에 나는 아직 문제를 찾지 못 해서 초조하다. 사실 최근 몇 주간이 최악이라고 느꼈던 것도 주제 찾으려고 논문을 엄청나게 보면서 '만약 운 좋게 교수 되면 평생 이런 압박을 느껴야 하는 건가?', '아니 그보다 논문 주제도 못 잡는데 교수가 될 자질이 있긴 한 건가?,' '근데 왜 나 한국에 있을 때보다 공부 많이 안 하는 것 같지?' 이런 온갖 잡생각을 다 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고 잃었던 식욕을 되찾고 식빵 굽기, 파스타 만들기 말고 제대로 된 요리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지난주부터 읽기 시작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덕분이었다. 방학 때 집에 갔을 때 개강하면 조깅하려고 동기부여 차원에서 사왔던 책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조깅은 관둔지 3주는 된 것 같다). 솔직히 쓰자면 10km가 넘는 달리기에 매력을 느껴본 적은 없어서 그 부분은 그럭저럭이었는데, 작가가 추구하는 건강한 신체, 건강한 생활이 내가 생각하는 연구자의 모습과 비슷했다. 천재가 아닌 나는 이렇게 작은 일들을 규칙적으로 해내면서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한다, 몇십 년간 연구자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한다, 아무리 공부하기 싫어도 하루에 최소 몇 시간 이상은 책상 앞에 붙어있어야 한다, 뭐 이런.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논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저녁 먹고 드러누워서 뒹굴거리거나 인터넷을 떠돌아 다니는 대신 책을 읽게 되었고, 오늘 저녁에도 교수님께 이메일을 쓰고 블로그에 올릴 글도 쓰고 있다. 오늘 저녁은 확실히 최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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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부터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해서 아침형인간의 시대가 끝난 건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다시 여섯 시에 일어났다.


  실은 이번 주 내내 6시에 일어났다가 다시 자고 하는 것을 반복했는데, 역시 한 번에 일어나는 날은 몸의 상태가 다르다. 어제만 해도 일어났는데도 눈이 감기고 침대에서 몸이 안 떨어졌는데 오늘은 다소 가뿐하다. 다소라고 쓴 것은 어제 스트레칭을 제대로 안 하고 자서 삐걱거리는 곳이 좀 있어서다.


  일어나자마자 메일 확인을 했는데 그저께 저녁부터 숙제를 물어보던 학부생한테서 다시 질문 메일이 와 있고 새벽 세 시에 이 과목 교수님이 보내신 답장도 와 있었다. 다른 학생이 나한테 물어봤던 내용을 전달하면서 애들이 제일 자주 물어보는 게 이거였다 라고 보냈는데 왜 나한테 답을 보내신 건지 모르겠다. 내가 모른다는 게 아닌데...아무래도 시간 때문인 것 같다. 질문하는 학생한테는 이전 메일에서 블랙보드에 있는 handout을 보라고 했더니 무슨 handout을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핸드아웃 업로드된 건 하나밖에 없는데...이 녀석아 공부는 하고 숙제를 해야지! 이번 숙제는 유독 기본 지식이 숙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질문을 하러 오는 경우가 많다. 뭐 중간고사 날짜도 정해졌으니 알아서들 하겠지.


  금요일에 또 학과 세미나를 한다. 2016-2017 학기에는 1년 동안 세미나가 서너 번 밖에 없던 것 같은데 이번 학기에는 아직 개강한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벌써 두 번째 세미나다. 그런데 금요일에 수업을 듣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고려가 되지 않는 것 같다. 해석학 수업이 11시 반부터 12시 20분까지인데 세미나 시간이 10시 반부터 12시까지다. 하긴 그런 사소한 사정까지 전부 고려하다 보면 절대 시간을 정할 수 없겠지. 아무튼 그 덕분에 수업시간에 제출해야 하는 숙제를 제출할 수 없어서 미리 해서 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이번 학기는 목요일과 금요일이 가장 바쁘다. 오늘은 숙제를 제출하고/조교수업을 하고/세미나 전에 guest speaker랑 박사학생들 만나는 자리 준비하러 논문을 미리 읽어야 하고, 내일은 세미나를 듣고/동기랑 하는 paper discussion을 준비해야 한다. 다른 날에도 물론 공부를 하고 논문을 읽고 오피스아워도 하는데 목요일과 금요일의 무게감은 확실히 다르다.


  요즘은 밤이 많이 길어져서 벌써 6시 51분인데도 아직도 해가 안 떴다. 몇 주 전만 해도 아침 일곱 시에 밖에 산책하러 나가면 그 이른 시간에 학교 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도 그런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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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학기에 어쩌다 보니 "Real analysis and Measure theory"라는 과목을 듣고 있다. 해석학이랑 관계된 대학원 과목이 "Real analysis"와 이 과목 이렇게 두 개 있었는데 이전 학기 교재목록을 찾다 보니 Real analysis 교재가 학부 2학년 때 들은 해석학 1, 2 교재인 Principles of Mathematical Analysis이던 때가 많아 보여서 이미 봤던 책을 또 볼 필요는 없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Measure theory 과목을 신청했다.



  이 과목은 일주일에 세 번 수업하기 때문에 개강 첫주가 끝난 지금까지 벌써 세 번의 수업을 들었고, 이제 와서 내가 얼마나 자만했는지 절실히 느꼈다. 나중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번 주엔 해석학2 부분의 시작인 Riemann integral에 대해 배웠는데(결국 PMA를 피하지는 못 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하다못해 가장 먼저 나오는 Riemann integrable의 정의를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였으니...하기야 Basic topology, continuity, differentiation 등을 포함하는 해석학1 부분이야 전공과 논문에서도 많이 사용되니까 잊어버리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지만 적분 부분은 2009년 2학기 때 해석학 2를 수강한 이후로는 거의 활용한 적이 없어서 복습을 따로 하지 않는 이상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다행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번 학기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겠다(언젠 안 그래도 되는 학기가 있던 것처럼). 수업은 전체 학기 2개, 후반기 수업 1개 이렇게 들으니 시간이야 당연히 넉넉하겠지만 한두 과목 삐끗하면 학점이 정말 말도 안 되게 나올 것 같다. 이번 주 지내 보니까 아직 시차적응이 완벽히 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영어공부에 드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연구나 수업 공부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 같다. 뭐 차차 고쳐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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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저녁 8시 20분 비행기로(40분 지연출발했지만) 한국을 떠나서 여기 시간으로 일요일 저녁 8시 좀 넘어서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하고 월요일 새벽 2시에 집에 와서 벌써 이틀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새벽 6시 반에 일어나더니, 미국에 돌아와서도 월요일엔 좀 늦게 일어나고(10시 반) 화요일엔 한국 가기 전과 별 다를 거 없이 새벽 4시 45분에 일어나서 어쩌면 난 시차에 금방금방 적응하는 체질일지도 모르겠다는 헛된 꿈을 꿨었는데...시차적응을 잘 한 게 아니고 그냥 밤잠이 없어진 거였다.


  오후 3시부터 어서 잠들어 버리라고 보채는 몸과 싸워야 했고, 급기야 저녁 6시에는 잠깐 엎드려서 30분 동안 자기까지 했다. 사실 그냥 집에 왔어도 됐던 시간이었는데...아무튼 자다 깨자마자 짐 챙겨서 나와서 힘겹게 집에 도착해서 옷만 갈아입고 자려고 알람 맞춰놓고 침대에 누웠는데 아파트에서 화재 경보기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화재 경보기가 하도 자주 울리다 보니 그냥 무시하는 것이 보통이어서 그냥 자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알람 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커졌고, 기숙사 스탭들이 밖으로 나오라고 문을 두드려 대서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불이 난 것이 아니라 화재 경보기 점검 및 탈출 연습이었다. 이거 5월에도 하지 않으셨나요...대체 왜 또...거기다 왜 하필 이 시간에...그래도 금방 정리되긴 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아무 방해도 없는 상태가 되어 알람을 맞춰놓고 잠들었다 깨어 보니 밤 10시 44분이었다. 와 낮잠을 무슨 세 시간이나 잔 건가. 잘 자고 일어나서 몸이 가뿐해지긴 했지만 몸이 가뿐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시간은 아닌 것 같다. 거기다 몇 시간 있으면 또 잘 텐데.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밥도 가뿐히 먹자고 포도랑 요플레 갖다가 먹고 있다.


  내 오피스에는 1학년 두 명이 더 들어와서 이제 책상 개수와 딱 맞는 4명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내 동기네 오피스에는 무려 세 명이 더 들어와서 오피스를 다섯 명이 쓴다고 한다. 아무리 나랑 동기네 오피스가 다른 곳보다 좀 크다고 해도 정원이 꽉 차 있으면 정말 북적북적하다. 바로 옆 연구실만 해도 책상 네 개에 학생 두 명이 배정되었는데 왜 이 두 곳만 꽉 채운 건지 모르겠다. 거기다 내 오피스는 여자 셋, 남자 하나고 동기네 오피스에는 남자 넷, 여자 하나가 배정되었다. 작년에는 성별 분리해서 배정한답시고 입학정원이 단 두 명인 과도 분리했으면서. 우리 방은 아직까지 네 명이 다 앉아있던 적이 없어서 아직은 좁아진 줄 잘 모르겠고, 봄 학기말부터 원래 있던 오피스메이트와 급격히 친해져서 얘랑 1년 더 방을 같이 쓰는 것도 좋고, 만약 동기랑 방을 같이 썼다면 지나치게 친해져서 둘다 망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정신승리하고 있다.


  어느덧 자다 깬지 50분이 되었다. 신나게 잘 자고 일어났으니 이제 원래 하려던 일들을 해야겠다. 한국에서 논문 한 줄 안 보고 놀던 게 습관이 돼서 그런가 아직 집중력이 완벽히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연구는 앞으로도 몇십 년은 계속 해야 하니ㅜㅠ빨리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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