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있지 않을 때는 절대 침대에 눕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난 주에만 무려 5일을 '공부 시작하기 전에 잠깐 누워있어야징ㅎㅎ'하고 방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잠들어서 새벽 다섯 시에 깼다. 물론 그래봐야 다섯 시간 밖에 안 잔 거라서 개이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래놓고 아침 수업이 있는 날은 새벽에 깨서 설거지하고 공부하고 씻고는 피곤해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가 수업에 10분씩 지각을 하고, 아침 수업이 없는 날도 설거지하고 공부하고 씻고 나서 다시 누웠다가 느지막하게 학교에 가는 것이 반복되었다. 역시 나라는 인간에게는 조금의 여유도 줘서는 안 되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혼자 쓰는 침대가 꽤 크다 보니 그 위에 옷이며 책이며 온갖 것들을 다 널어놓아도 밤에 자는 데 지장이 없어서 방에 있을 때면 늘 침대에 붙어있는 와식생활을 했었다. 그렇지만 여긴 잘못하면 자다가 떨어질 수도 있는(실제로 한 번 떨어졌다) 좁은 트윈 침대라서 그런 것은 꿈도 못 꾼다. 거기다 딱딱한 매트리스를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만들어 보려고 메모리폼 토퍼를 사서 깔아놨더니 이건 완전 잠자기에만 최적화된 가구가 되어서 침대에 누우면 무조건 자게 된다. 그걸 알면서도 따뜻하고 안락한 느낌 때문에 매번 실패했는데, 조금 전에 침대에 누우려다가 더 이상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걸음을 멈췄다. 심지어 목요일에 시험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봄방학 끝나고 정말 바빴다. 시험 두 개, ta 세션 두 번, 수많은 숙제들 때문에 일요일에도 학교에 가는 비상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거기다 지금은 완전히 끝났지만 tax refund 서류 준비까지! 저번 일기에도 썼었지만 하루하루를 집에 조금이라도 빨리 기어들어가는 야욕에 사는 나에게 정말 가혹한 일이다. 그렇지만 매트랩이랑 TeXstudio를 정상적으로 사용하려면 학교에 갈 수밖에 없다. 집에서 쓰는 노트북에도 TeXstudio를 깔아놓긴 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컴파일을 몇 번이나 눌러야 겨우 반영이 돼서 답답하다. 그러다 보니 쾌적한 환경에서 Latex를 사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가야 되는 것이다.


  뭐 어쨌든.


  방학 시작하기 전까지는 계속 이런 식일 것 같다. 코스웍도 그렇지만 굳이 지원해서 혼자 하고 있는 optional project를 어떻게 조금이라도 성과를 내보려면 그냥 이번 학기는 글렀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만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맥빠지는 소식이 있다.


  서로 다른 과목을 맡고 있긴 하지만 나나 동기나 1년 동안 과중한 ta 업무에 시달리면서 2학년 때는 ra가 되고 싶다고 생각날 때마다 얘기했었다. 그런데 오늘 다음 학기에도 우리가 ta를 맡아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건 정말 너무하다. ta를 배정받는 학부 과목이 두 개 있는데 1학년 때 그 두 과목을 가을과 봄에 나눠서 번갈아 맡게 된다는 것을 입학할 때 들어서, 지난 학기 말에는 종강하는 대로 동기한테 수업자료 다 넘기고 이 지긋지긋한 과목(사실 지긋지긋하다기보다는 힘들다는 표현이 맞다. ta 세션도 혼자 8번을 다 해야 하고 숙제도 전부 내가 풀어서 설명해야 하고 오피스 아워도 혼자 다 해야 하니까) 빨리 때려치워 버려야겠다고 신났지만 어쩐 일인지 다시 이 과목을 맡게 되었었다. 그래놓고도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못 해서 불과 몇 시간 전에 동기랑 수업 듣고 걸어오면서 이번 여름에 계절학기 ta하고 내년 가을에는 1학년 애들이 ta하면서 힘들어하는 걸 보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고약한 속마음까지 동기에게 털어놨었는데. 사실 내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다. 가을학기에 영어 말하기 시험을 한 번에 통과한 동기는 올해 또 다른 2학년 선배가 하는 것을 미루어 봤을 때 ta가 아니라 아예 수업 하나를 맡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더 이상 불평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은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절대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걸 스물아홉이나 되어서야 깨달았다는 것이 나조차도 믿기지 않지만 갈수록 그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된다. 언젠가부터 내가 사람을 양식화해서 '이런 사람은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미리 단정짓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건 순전히 게으름의 발로다. 한 사람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미리 내려놓은 결론에 끼워맞추려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게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게 나처럼 인간관계의 주역이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에게는 더 없이 편리한 방법이라서 굳이 고칠 생각을 하지 못 했었다. 그런데 유학을 와서 여러 사람들을 계속 접하다 보니 나의 지식이나 상식 수준에서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이 정말 하나도 안 들어맞는다. 그리고 앞으로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서 내가 우물 안 개구리에서 완전히 벗어난다고 해도 내 예상이나 추측이 맞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자기 전에 절대 눕지 않겠다고 글을 쓰기 시작한지 벌써 한 시간이 되어서 요즘만 간단히 쓰면 이 정도일 거다. 모든 사람들을 풀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고 그냥 꾸준히 도전하고 지켜보자고. 그러면 상대방이 '어느 날 갑자기' 변했다고 느낄 일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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