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하다가 이 새벽에 브라우니를 구웠다. 처음 브라우니 믹스를 살 때의 생각은 구워서 연구실 친구들하고 동기한테 나눠줘야겠다 였는데 금요일 새벽에 난데없이 충동적으로 브라우니를 구웠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그냥 혼자 다 먹으려고 한다. 미국 와서 지금까지 빵을 총 세 번 해봤는데, 아마도 겨울방학 때 전기밥솥으로 만들었던 당근케익은 어떤 면에서 이게 당근이고 이게 케익인지 분별해낼 수 없을 정도로 망했고, 그 다음에 내 생일 케익으로 만들었던 화이트 바닐라 케익?? 은 팬 전체에 식용유를 발라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바닥에만 발랐다가 거의 대부분을 팬에 붙인 채 못 먹게 된 데다, 익었는지 확인할 때 젓가락으로 찔러본다는 안내문을 제대로 못 봐서 흐느적거리는 것을 먹었어야 했다. 오늘 만든 브라우니는 젓가락으로 찔러보는 것도 알고 팬에 식용유도 적절히 잘 바르고 젓가락으로 찔러봐야 한다는 것도 알았는데 이상하게 적정시간이 다 되도록 굳혀지지가 않았다. 다시 상자를 읽어보니 팬 크기별로 조리시간이 다른데 내가 사용한 8인치x8인치 팬은 무려 52분에서 55분이나 조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절망했다. 그래도 뭐, 조리시간 내내 오븐 앞에 붙어 앉아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서(어차피 오븐에 투명 창이 없어서 보이는 것도 없다) 거의 잊어버릴 때쯤 오븐에서 꺼내왔다.



  작년 말부터 매일 운동을 하기로 마음 먹어놓고 그나마 지금까지 꼬박꼬박 하고 있는 것은 스트레칭(매일)과 플랭크(이건 이틀에 한 번 정도)인데 여름방학 때 라크로스볼을 사서 매일 어깨와 등을 마사지하는 것을 추가했다. 그 밖에 집 밖에서 하는 운동이 학교에서 왔다갔다하고 퇴근할 때 걸어오는 것 등을 합쳐서 하루에 한 시간 반 정도 걷는 것 밖에 없기 때문에 정말 말 그대로 최소한의 운동만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중 스트레칭과 볼 마사지는 사람 하나 살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다리도 덜 붓고 한국에 있을 때부터 만성적으로 아팠던 어깨와 목도 잘 때 모로 누워서 잘 수도 있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 근육을 단련시키는 운동을 하고 싶긴 한데 아직도(입학한지 벌써 13개월이 넘었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학교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한 것이 지난 가을, 봄학기에 총 세 번, 이번 학기에 한 번이 고작이다.



  이번 학기 들어 왜 이렇게 우울할까 또 생각해 봤는데, 단기 목표를 세워서 해내라는 친구의 말대로 단기 목표라고 할 것이 없어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지내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니 내가 가장 생기넘치는 때는 조교 수업을 준비하는 조교 수업 3일 전부터, 그리고 매주 금요일에 제출하는 measure theory 숙제를 시작해서 끝내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였고,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던 때는 수요일에 미리 해석학 숙제를 끝내고 목요일 저녁을 잉여거리며 보냈던 날이었다. 동기랑 하는 paper discussion을 준비하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도 머리가 다 아플 정도로 의욕이 넘쳤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정작 무기력하게 보냈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 같은데, 조교 수업은 지지난주 목요일에 수업을 하고 이제 2주나 더 있어야 다음 수업 일정이 잡혀 있고, paper discussion은 지금 거의 3주째 안 하고 있고 해석학 숙제 제출일은 점점 미뤄져서 이번 주에는 월요일에 지난 숙제를 제출했고 다음 주 금요일에야 다섯 번째 숙제를 제출해야 한다. 따라서 그 사이의 스케줄은 자연히 내 마음 먹기에 달려있는 건데, 다소 강제적인 일정들 외에 개인적인 목표가 없어서 그 짧은 2, 3주 동안에 엄청난 우울함과 외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오늘 해석학 중간고사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걸 느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까지 마치려고 했던 논문 수정 계획을 다다음주 주말까지로 바짝 앞당길 계획이다. 나란 녀석은 뭔가 여유를 주면 안 되는 것 같다. 요 며칠새 새로 생각 중인 분야의 논문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무기력+일 벌리기+망각이 겹치면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다. 방학 내내 미뤄왔던 것을 이주 만에 숙제+조교수업+시험감독+중간고사와 함께 끝낸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계획인 것 같고 생각만 해도 한숨나오지만 이게 스스로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나한테는 유일한 동앗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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