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제목의 일기이지만 책에 관한 일기는 아니다.


  원래 이 문단은 "솔직히 쓰자면 최근 몇 주간은 최악이다"로 시작할 예정이었고, 그 문장을 지운 이후에는 "신기하게도 집 밖에서 언제든 누구와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영어로 말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영어로 생각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은 아예 떠올리지도 않게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썼던 건데, 막상 글로 써놓고 보니 '그래도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는데,' '무슨 집 밖에서만 단순하게 생각해. 원래 단순했고 집에서도 그렇게 복잡한 생각은 안 하면서'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는 것과 글로 끄집어낸 것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하긴 요즘 논문 수정하면서 고생하고 있는 것도 머리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던 것들을 꺼내는 게 어려운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동기는 교수님을 압박(?)해서 뭔가 연구를 시작했다. 서로 경쟁심을 느끼는 관계가 아니라서(적어도 나는) 꼭 잘됐으면 좋겠지만 그 와중에 나는 아직 문제를 찾지 못 해서 초조하다. 사실 최근 몇 주간이 최악이라고 느꼈던 것도 주제 찾으려고 논문을 엄청나게 보면서 '만약 운 좋게 교수 되면 평생 이런 압박을 느껴야 하는 건가?', '아니 그보다 논문 주제도 못 잡는데 교수가 될 자질이 있긴 한 건가?,' '근데 왜 나 한국에 있을 때보다 공부 많이 안 하는 것 같지?' 이런 온갖 잡생각을 다 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고 잃었던 식욕을 되찾고 식빵 굽기, 파스타 만들기 말고 제대로 된 요리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지난주부터 읽기 시작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덕분이었다. 방학 때 집에 갔을 때 개강하면 조깅하려고 동기부여 차원에서 사왔던 책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조깅은 관둔지 3주는 된 것 같다). 솔직히 쓰자면 10km가 넘는 달리기에 매력을 느껴본 적은 없어서 그 부분은 그럭저럭이었는데, 작가가 추구하는 건강한 신체, 건강한 생활이 내가 생각하는 연구자의 모습과 비슷했다. 천재가 아닌 나는 이렇게 작은 일들을 규칙적으로 해내면서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한다, 몇십 년간 연구자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한다, 아무리 공부하기 싫어도 하루에 최소 몇 시간 이상은 책상 앞에 붙어있어야 한다, 뭐 이런.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논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저녁 먹고 드러누워서 뒹굴거리거나 인터넷을 떠돌아 다니는 대신 책을 읽게 되었고, 오늘 저녁에도 교수님께 이메일을 쓰고 블로그에 올릴 글도 쓰고 있다. 오늘 저녁은 확실히 최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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