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수업 하나랑 저녁 조교가 있는 날인데 수업이 휴강되는 바람에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다 읽었다. 사실 데이빗 소로의 '월든'과 존 치버의 '왑샷 가문 연대기'를 동시에 읽는 중이어서 그걸 먼저 읽었어야 했는데...제목 때문에 읽기 시작한 '왑샷'이 생각했던 것보다 지루해서 위의 책을 먼저 읽었다.


 '원더보이'가 기대에 못 미쳐서 그 동안 김연수의 책에는 손이 가지 않았는데, 이 책은 엄청난 반전이나 극적인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되었고 다 읽고 나서는 꼭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앞부분까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극심한 격랑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의 인생을 읽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후반부에 가서는 진짜 진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길용=강시우는 간첩이었을까, 아니면 프락치였을까? 결말을 읽고 나서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좀 전에는 '피츠제럴드 단편선 2'에 실린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을 읽었다. 예전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참 좋게 봐서(비슷한 시기에 '시간여행자의 아내'를 봐서 그런가 언제나 이 두 영화가 같이 떠오른다) 빌려본 건데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그런 애잔함이나 고요한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서 조금 놀랐다. 하긴 '미드나잇 인 파리'에도 잠깐 나왔던 스콧 피츠제럴드의 인생을 보면 영화보다는 책의 느낌이 작가와 더 잘 어울릴 것 같긴 하다. 새삼 같은 소재를 두고도 얼마나 다양한 방식의 변주가 일어날 수 있는지 느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굉장히 재미있게 봤고 여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굉장히 많은데도 책 카테고리가 아닌 일기 카테고리에 감상을 쓴 건 책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 때문이다. 얼마 전에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한 사람의 인생이나 역사가 순전히 주관적이고 편협한 몇몇 생존자들의 기억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정말 위태로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에 더하여, 오늘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만약 내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다면 누가 어떤 방법으로 사라지기 직전까지의 나를 온전히 재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동안 했다(물론 내가 갑자기 없어진다는 가정 자체가 말도 안되는 것이긴 하지만). 대학원에 입학한 이후로 내가 사람들과 소통하고 하루하루의 이야기를 쓰는 주된 공간은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가 되었는데 그 곳에서 조각조각 떠다니는 글들이 날 얼마나 많이 담고 있는지는 확신을 못하겠다. 날 아는 사람이 많아서 구질구질한 감정들이나 나의 치부에 관해서는 쓰지 않고 좋은 일들, 좋은 감정들만 주로 쓰기 때문이다. 잡다한 말을 많이 썼는데 아무튼 그래서 당분간 학교 커뮤니티를 끊고 종이 일기장과 블로그에만 최대한 솔직한 글을 쓰기로 했다. 내가 생각하는 솔직함이 어느 정도의 솔직함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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