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너무 바쁘다.


  가을방학 직전까지만 해도 난 왜 이렇게 심심하고 우울할까 하는 생각을 계속 했었는데 이건 뭐, 너무 바쁘고 거기에 맞춰서 몸도 부지런해져서 우울할 틈이 없다. 금요일에 real analysis 숙제를 제출했고 어제인 화요일엔 오피스아워랑 조교수업이 있었고 오늘은 real analysis review session에 갔다가 중간에 나와서 시험감독을 하러 갔으며, 오는 금요일에는 (또) real analysis 중간고사를 본다. financial management 수업도 오늘 시작해서 토요일, 일요일에 케이스를 읽고 월요일과 화요일에 교과서 읽기 숙제와 케이스 숙제를 해서 겨우 오늘을 해결했는데 내일 수업이 또 있어서 지금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주말에 부모님이랑 통화한 것 외에는 계속 영어로만 말하고 있어서 피곤하다. 진짜 말만 해도 피곤하다.


  mba 수업을 제외하면 우리 과 수업은 경영대 안에서 많이 열리지 않다 보니 수강신청을 전략적으로 잘 하기만 하면 어떻게 편하게 한 학기를 보낼 수도 있을 텐데 이번 학기는 완전 실패한 것 같다. 물론 절대적인 비중은 real analysis가 가장 크다. 이 지경인데도 정신 못 차리고 봄 학기에 functional analysis를 들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으니...교수님이 듣지 말라고 하셨으면 좋겠다. 수업만 듣고 있을 게 아니라 연구를 좀 더 바쁘게 해야 되는 건데!


  미국에서 만난 한국인이 아닌 친구들 중 실수로라도 한국말로 말을 걸었던 친구는 지난 봄 학기 mba 수업에서 만난 인도인 친구가 유일한데(지금은 연락도 안 함), 가끔 내 동기에 대해서도 한국말로 생각할 때가 있다. 지금까지 딱 세 번 '너 이 자식!' 하고 생각했는데, 작년 가을학기에 이유는 모르겠으나 뭔가 나한테 삐졌거나 서운한 일이 있는 것 같아보여서 '이 자식이 왜 이러지' 하고 생각했던 게 처음이었고, 이번 학기에는 벌써 두 번이나 그 생각을 했다. 이번 주 월요일에 자기가 공부 루틴을 바꿨다면서 앞으로 밤 11시까지 연구실에 있을 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이 자식...너무 열심히인데...'하고 좀 감동을 받아서 갑작스럽게 경쟁심을 느껴서 새벽 3시까지 공부했다가 바로 다음날인 어제는 탈진+밤 10시까지 조교수업하고 지침이 겹쳐서 10시 40분 넘어서 집에 와서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잤다.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바로 오늘인데, 같이 financial management 수업을 듣는데 마침 오늘 배운 재무제표에 전혀 백그라운드가 없는 상태에서 꽤 불친절한(!) 수업을 듣고 충격을 받았는지 드롭을 하겠다는 거다. 학부 때 회계수업 세 개, 재무수업 두 개를 듣고 나는 회계에는 꽤 재능이 있지만(전부 A) 재무는 엉망진창이구나(전부 B), 재무는 앞으로 듣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이 친구가 재무를 듣고 싶다고 해서 그래 그럼, 하고 들어갔던 건데 정작 자기는 빠지겠다니. 이 자식이 날 불구덩이에 빠뜨려놓고 혼자 빠져나간다, 뭐 이런 생각을 했었다. 물론 정말로 화난 건 아니고 그냥 섭섭했던 거고, 섭섭한 걸 티낼 만큼 심각한 감정은 또 아니다. 근데 이 친구가 날 두고 수업을 드롭한 게 벌써 두 번째라서, 앞으로는 정말 내가 듣고 싶은 것만 수강신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원 > 박사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폭풍같은 일주일  (0) 2017.11.04
20171028 토요일  (0) 2017.10.29
20171010 가을방학 마지막날  (0) 2017.10.11
브라우니  (0) 2017.10.06
새 집  (0) 2017.10.05

  가을방학이 끝났다. 사실 월, 화 이틀 밖에 안 되지만 금요일 저녁 때부터 조금씩 들뜨기 시작해서 방학 내내 재밌게 놀았다. 일요일과 월요일엔 학교 가서 공부를 하고, 토요일과 오늘은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것 외에는 집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들어서 내일 학교는 어떻게 갈지 걱정이다.



  어제는(월요일) 점심 도시락 싸서 가려고 채소를 다 썰어놨더니 갑자기 전기가 나가버렸다. 기숙사 사람들로 구성된 groupme가 그것 때문에 엄청 웅성거렸는데, 누가 메인 오피스 가서 물어보니까 건설 중에 뭔가를 건드려서 전기가 나간 것 같다고 했다고 해서 금방 전기가 들어올 줄 알고, 저녁은 집에서 먹을 생각으로 학교에 갔다. 몇 시간 지나서 전체메일로 다섯 시에 전기공급이 재개될 것 같다고 해서 생각보다 심각하긴 한가보다, 그리고 어차피 난 다섯 시엔 집에 있지도 않을 텐데 뭐, 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 다음엔 또 일곱 시에 전기가 들어올 것 같다고 해서 실망했지만, 여전히 그 때까지는 집에 도착하지 않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그리고 여섯 시 반이 좀 지나서 몇 군데 알아본 아파트 중 한 곳의 주변을 정탐(?)하기 위해 짐을 챙겨서 퇴근했다. 분명 매니지먼트 사이트에는 연구실이 있는 건물에서 9분 거리라고 했는데 구글 지도에서 계산한 결과로는 13분이 걸렸고, 방학 중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인적이 드물고 길도 몇 번이나 건너야 하는 등 다소 위험해 보여서 마음 속에서 지웠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비록 도보로 25분이 걸리긴 해도 학교 안에서만 걸어다닐 수 있어서 참 좋은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걷는 길에 다른 아파트들도 구경했다. 구글과 레딧에서 검색해 보면 엄청나게 악명이 높은 곳이 두세 곳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이곳저곳 심지어 좋은 위치에 아파트 단지를 많이도 만들어 놨다. 저 회사가 한 달 치 렌트 만큼의 deposit을 별 핑계를 다 대어가며 떼어먹는다는 리뷰를 보지 않았다면 높은 확률로 저 중 한 곳에 입주했을 텐데. 학교 주변의 큰 회사들은 대부분 deposit을 갖가지 명목으로 떼어먹는다니까, 이왕이면 떼어먹는 액수가 적은 곳에 가서 반쯤 포기하고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해서 집 밖에 안 나가고 집에서 영어공부 하다가 몇 군데 눈여겨본 아파트 매니지먼트에 이메일을 보냈다. 근무 시간이 끝나고 나서 메일을 보내서 한 곳 밖에 답이 안 왔는데, 모든 조건이 나와 맞지 않아서 못 갈 것 같은데 답장을 보내준 직원이 너무 친절해서 계속 미련이 남는다. 8월부터만 입주가 가능하고, 침대, mattress, dresser가 제공되는 가구의 전부라서 만약 여기로 이사간다면 기숙사에서 나가는 5월부터 8월 초까지 살 수 있는 sublet을 따로 구해서 두 번이나 이사해야 하고, 책상, 식탁, 의자 등 상당수의 가구를 사야 한다는 엄청난 문제가 있는데도 말이다. 사실 아직도 좀 고민이 되는데, 이사 두 번할 생각하면 끔찍해서 그냥 여긴 포기하기로 했고, 대신 마찬가지로 방을 찾고 있는 연구실 친구에게 매니지먼트에서 보낸 답장을 포워딩해줬다. 그리고 10시 이후부터는 아무리 그래도 방학인데 금요일에 제출해야 하는 real analysis 숙제를 반도 안 해놓는 건 너무한 것 같아서 숙제를 풀고 있었다.



  사실 어제는 집 생각만 한 게 아니라 saving account 생각도 했고 자전거 사는 것도 생각했었는데, saving account는 그렇다 치고, 자전거는 지금 당장 필요하지도 않고 이사하기 전에 짐을 더 이상 늘리면 안 되므로 당분간 사지도 말고 생각도 하지 말아야겠다. 물론 이런 것들이 전부 중요한 것들이긴 하지만 지금 당장 내 본업ㅠㅠ도 제대로 못 하고 있고 하 지금 한 번에 고민 중인 문제가 너무 많아서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한 번에 생각할 수 있는 것들만 같이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아파트 매니지먼트에 컨택 메일을 보냈던 것도, 이만하면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정보는 충분히 구했으니 이제 나머지는 계속 검색해서 얻을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한테 직접 얻어야 할 것들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답장을 받기 전까지는 이제 내가 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냥 잊어버리고 기다려야지 뭐. 며칠 동안 알아볼 수 있는 건 다 알아본 것 같다.



  오늘 하루 종일 재채기, 콧물, 기침이 나와서 조금 전에 자기 전에 먹는 감기약을 먹었다. 벌써 좀 졸리기 시작하는 게 오늘은 일찍 잘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은 11시 반 수업이 있으니까 일찍 일어나서 시금치두부무침 해서 어제 끓인 카레랑 같이 도시락 싸고 연구실 가는 길에 cvs 가서 낮에 먹는 감기약을 사야지.

'대학원 > 박사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1028 토요일  (0) 2017.10.29
20171018 가을방학 끝나고  (0) 2017.10.19
브라우니  (0) 2017.10.06
새 집  (0) 2017.10.05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1) 2017.09.29

  공부를 하다가 이 새벽에 브라우니를 구웠다. 처음 브라우니 믹스를 살 때의 생각은 구워서 연구실 친구들하고 동기한테 나눠줘야겠다 였는데 금요일 새벽에 난데없이 충동적으로 브라우니를 구웠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그냥 혼자 다 먹으려고 한다. 미국 와서 지금까지 빵을 총 세 번 해봤는데, 아마도 겨울방학 때 전기밥솥으로 만들었던 당근케익은 어떤 면에서 이게 당근이고 이게 케익인지 분별해낼 수 없을 정도로 망했고, 그 다음에 내 생일 케익으로 만들었던 화이트 바닐라 케익?? 은 팬 전체에 식용유를 발라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바닥에만 발랐다가 거의 대부분을 팬에 붙인 채 못 먹게 된 데다, 익었는지 확인할 때 젓가락으로 찔러본다는 안내문을 제대로 못 봐서 흐느적거리는 것을 먹었어야 했다. 오늘 만든 브라우니는 젓가락으로 찔러보는 것도 알고 팬에 식용유도 적절히 잘 바르고 젓가락으로 찔러봐야 한다는 것도 알았는데 이상하게 적정시간이 다 되도록 굳혀지지가 않았다. 다시 상자를 읽어보니 팬 크기별로 조리시간이 다른데 내가 사용한 8인치x8인치 팬은 무려 52분에서 55분이나 조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절망했다. 그래도 뭐, 조리시간 내내 오븐 앞에 붙어 앉아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서(어차피 오븐에 투명 창이 없어서 보이는 것도 없다) 거의 잊어버릴 때쯤 오븐에서 꺼내왔다.



  작년 말부터 매일 운동을 하기로 마음 먹어놓고 그나마 지금까지 꼬박꼬박 하고 있는 것은 스트레칭(매일)과 플랭크(이건 이틀에 한 번 정도)인데 여름방학 때 라크로스볼을 사서 매일 어깨와 등을 마사지하는 것을 추가했다. 그 밖에 집 밖에서 하는 운동이 학교에서 왔다갔다하고 퇴근할 때 걸어오는 것 등을 합쳐서 하루에 한 시간 반 정도 걷는 것 밖에 없기 때문에 정말 말 그대로 최소한의 운동만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중 스트레칭과 볼 마사지는 사람 하나 살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다리도 덜 붓고 한국에 있을 때부터 만성적으로 아팠던 어깨와 목도 잘 때 모로 누워서 잘 수도 있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 근육을 단련시키는 운동을 하고 싶긴 한데 아직도(입학한지 벌써 13개월이 넘었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학교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한 것이 지난 가을, 봄학기에 총 세 번, 이번 학기에 한 번이 고작이다.



  이번 학기 들어 왜 이렇게 우울할까 또 생각해 봤는데, 단기 목표를 세워서 해내라는 친구의 말대로 단기 목표라고 할 것이 없어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지내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니 내가 가장 생기넘치는 때는 조교 수업을 준비하는 조교 수업 3일 전부터, 그리고 매주 금요일에 제출하는 measure theory 숙제를 시작해서 끝내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였고,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던 때는 수요일에 미리 해석학 숙제를 끝내고 목요일 저녁을 잉여거리며 보냈던 날이었다. 동기랑 하는 paper discussion을 준비하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도 머리가 다 아플 정도로 의욕이 넘쳤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정작 무기력하게 보냈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 같은데, 조교 수업은 지지난주 목요일에 수업을 하고 이제 2주나 더 있어야 다음 수업 일정이 잡혀 있고, paper discussion은 지금 거의 3주째 안 하고 있고 해석학 숙제 제출일은 점점 미뤄져서 이번 주에는 월요일에 지난 숙제를 제출했고 다음 주 금요일에야 다섯 번째 숙제를 제출해야 한다. 따라서 그 사이의 스케줄은 자연히 내 마음 먹기에 달려있는 건데, 다소 강제적인 일정들 외에 개인적인 목표가 없어서 그 짧은 2, 3주 동안에 엄청난 우울함과 외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오늘 해석학 중간고사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걸 느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까지 마치려고 했던 논문 수정 계획을 다다음주 주말까지로 바짝 앞당길 계획이다. 나란 녀석은 뭔가 여유를 주면 안 되는 것 같다. 요 며칠새 새로 생각 중인 분야의 논문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무기력+일 벌리기+망각이 겹치면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다. 방학 내내 미뤄왔던 것을 이주 만에 숙제+조교수업+시험감독+중간고사와 함께 끝낸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계획인 것 같고 생각만 해도 한숨나오지만 이게 스스로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나한테는 유일한 동앗줄인 것 같다.

'대학원 > 박사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1018 가을방학 끝나고  (0) 2017.10.19
20171010 가을방학 마지막날  (0) 2017.10.11
새 집  (0) 2017.10.05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1) 2017.09.29
새벽  (0) 2017.09.14

  내년 봄 학기가 끝나고 이사를 가게 됐다. 학부 신입생 수가 늘어나면서 지금 살고 있는 대학원생 기숙사가 학부용으로 바뀐다는 통보를 받았다. 원할 경우 다른 곳에 있는 대학원생 기숙사로 이사갈 수 있다고는 하는데, 처음 기숙사를 신청했을 때 그 곳의 싱글 원베드룸이 부족해서 여기로 보내진 것이고, 올해 여름에 그 기숙사 단지 근처를 지나가다 건물들을 철거하는 것을 봐서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기숙사 관리자에게 transfer를 신청하면 확실히 원베드에 배정될 수 있는지, 그리고 혹시나 1, 2년 후에 또 이사를 해야 하는 게 아닌지 물어봤는데 어느 것도 확답을 줄 수 없다고 해서 마음 편히 학교에서 가까운 off-campus housing을 찾기로 했다.


  퇴거 통보를 받은 것이 월요일 오후라서 그 이후로 계속 멘붕한 상태로 집을 알아보고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는 등 부산을 떠느라 제대로 일을 하지 못 했다. 이틀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직접 가서 보지 않는 이상 옮길 방에 관한 어떤 새로운 정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서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상태다. 다음주 월, 화가 가을방학이라 몇 군데 후보군들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연구실과의 거리를 가늠해볼 예정이다.


  동기와는 지난주 화요일인가, 수요일 이후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1) 지금 교수님과의 과제 때문에 동기가 매우 바쁨 2) 동기가 바쁜 와중에 나 혼자 심심해서 잉여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음 3) 동기는 숙제 물어볼 때 외에는 내 연구실로 찾아오는 법이 없어서 서운함 등이다. 사실 바쁜 동기를 배려하기 위한 것보다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다. 학부나 석사 때는 내가 항상 동기의 입장이었는데, 아무리 바빠도 한 사람이라도 말 걸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지금도 내가 동기한테 가서 10분, 20분 떠든다고 연구를 엄청나게 방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아직도 우울한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 해서 집중력이나 공부에 대한 의욕이 많이 떨어진 상태인데 한창 새로운 연구 과제 때문에 의욕과 열정이 불타고 있는 동기랑 얘기하면 괜히 내가 더 초라하게 느껴질 것 같고, 내가 누가 말 걸어주는 것에 기뻤던 것과 달리 이 친구가 연구에만 온 신경이 가 있어서 대화에 집중하지 못 하면 짜증날 것 같아서 가기 싫은 거다.


  동기랑 이야기를 하지 않는 대신 월요일과 오늘은 각각 같은 방 여자 친구들, 그리고 한국인 여자 친구와 이야기를 했다. 아 정말 좋았다. 지난 글에는 내 친구가 동기밖에 없다고 썼었는데, 이 친구들과 대화를 할 기회가 별로 많지 않을 뿐이지 이 친구들도 친구다. 그것도 내가 엄청 좋아하는...아무튼 그렇게 실컷 수다를 떤 덕분에 우울함을 어느 정도 떨쳐내고 오늘은 이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있다. 차차 나아지겠지.

'대학원 > 박사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1010 가을방학 마지막날  (0) 2017.10.11
브라우니  (0) 2017.10.06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1) 2017.09.29
새벽  (0) 2017.09.14
20170826 해석학  (0) 2017.08.27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제목의 일기이지만 책에 관한 일기는 아니다.


  원래 이 문단은 "솔직히 쓰자면 최근 몇 주간은 최악이다"로 시작할 예정이었고, 그 문장을 지운 이후에는 "신기하게도 집 밖에서 언제든 누구와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영어로 말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영어로 생각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은 아예 떠올리지도 않게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썼던 건데, 막상 글로 써놓고 보니 '그래도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는데,' '무슨 집 밖에서만 단순하게 생각해. 원래 단순했고 집에서도 그렇게 복잡한 생각은 안 하면서'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는 것과 글로 끄집어낸 것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하긴 요즘 논문 수정하면서 고생하고 있는 것도 머리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던 것들을 꺼내는 게 어려운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동기는 교수님을 압박(?)해서 뭔가 연구를 시작했다. 서로 경쟁심을 느끼는 관계가 아니라서(적어도 나는) 꼭 잘됐으면 좋겠지만 그 와중에 나는 아직 문제를 찾지 못 해서 초조하다. 사실 최근 몇 주간이 최악이라고 느꼈던 것도 주제 찾으려고 논문을 엄청나게 보면서 '만약 운 좋게 교수 되면 평생 이런 압박을 느껴야 하는 건가?', '아니 그보다 논문 주제도 못 잡는데 교수가 될 자질이 있긴 한 건가?,' '근데 왜 나 한국에 있을 때보다 공부 많이 안 하는 것 같지?' 이런 온갖 잡생각을 다 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고 잃었던 식욕을 되찾고 식빵 굽기, 파스타 만들기 말고 제대로 된 요리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지난주부터 읽기 시작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덕분이었다. 방학 때 집에 갔을 때 개강하면 조깅하려고 동기부여 차원에서 사왔던 책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조깅은 관둔지 3주는 된 것 같다). 솔직히 쓰자면 10km가 넘는 달리기에 매력을 느껴본 적은 없어서 그 부분은 그럭저럭이었는데, 작가가 추구하는 건강한 신체, 건강한 생활이 내가 생각하는 연구자의 모습과 비슷했다. 천재가 아닌 나는 이렇게 작은 일들을 규칙적으로 해내면서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한다, 몇십 년간 연구자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한다, 아무리 공부하기 싫어도 하루에 최소 몇 시간 이상은 책상 앞에 붙어있어야 한다, 뭐 이런.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논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저녁 먹고 드러누워서 뒹굴거리거나 인터넷을 떠돌아 다니는 대신 책을 읽게 되었고, 오늘 저녁에도 교수님께 이메일을 쓰고 블로그에 올릴 글도 쓰고 있다. 오늘 저녁은 확실히 최악은 아니다.

'대학원 > 박사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브라우니  (0) 2017.10.06
새 집  (0) 2017.10.05
새벽  (0) 2017.09.14
20170826 해석학  (0) 2017.08.27
20170822 시차적응  (0) 2017.08.2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