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학교와 관계없는 일로 글을 쓴다.


  다음주 일요일에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한국 가서 만나야 할 사람들과(그 사람들 의사와는 관계없이 내가 미국 오기 전에 만나준 게 고마워서 만나야 할 것 같은 사람들) 전달해야 할 선물 목록을 만들었다. 그런데 계절학기 기말시험을 앞두고 있고 연구와 집안일, 그리고 완전히 바뀐 생활 패턴 때문에(매일 이르면 10시 반에서 11시 사이에 자고 늦으면 12시 좀 넘어서 잠들다 보니 밤에 도저히 뭘 할 수가 없다) 주문을 못 했었다. 오늘도 12시 좀 넘어서 자서 새벽 3시 45분에 일어났는데 어제 선물 때문에 고민하다 잤던 것이 생각나서 다시 자러 가지 않고 사이트들을 뒤졌다. 일부는 아마존, 일부는 빅토리아시크릿(내가 여기서 뭘 주문하는 날이 오다니), 일부는 Bath&body works에서 샀는데 도중에 배송비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서 The Body shop 등 다른 사이트도 알아봤는데 그나마 최선이 처음에 생각한 대로였다. 아마존 프라임에 익숙해서 배송비를 내야 한다는 생각을 거의 안 하고 있었는데 나머지 사이트에서는 2일 배송(expedited shipping) 요금만도 20불 가까이 돼서 정말 고민 많이 했다. 차가 있었다면 우리 동네ㅡ라고 하기엔 다소 멀지만 바로 옆 동네ㅡ에 있는 몰에도 빅토리아시크릿과 BBW가 있으니 가서 사오겠지만 버스 타고 그 먼 곳까지 가서 무더기로 사올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당장 면허도 없는데 차를 몰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검색해서 얻은 BBW 20% 할인 프로모션 코드 덕분에 그나마 마음이 풀렸다. 할인 금액이 배송요금보다 더 많다.


  막상 주문하기 전에는 집값을 제외한 내 한 달 생활비보다도 많은 돈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주문하고 나니 기분이 좋다(물론 한국 갔다 와서 생활비를 절약할 것을 생각하면 과히 즐겁지만은 않다). 이제 정말 한국에 간다는 것이 실감나기도 하고, 꽤 오랫동안 못 봤던 사람들을 볼 생각하니 기쁘기도 하다. 이제 그 사람들한테 제발 만나달라고 사정을 해야 할 텐데 휴. 일단 시험 준비랑 다음주 교수님 면담 준비부터 해야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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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오피스메이트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학교에 올 생각인가보다. 지난 주에는 월요일에 한 번 봤고 그 다음에 목요일이었나, 금요일이었나 와서 필요한 물건만 와서 찾아서 다시 갔다. 동기는 여전히 학교에 오지 않는다. 처음엔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1학년 중 학교에 나오는 사람들은 prelim 시험을 앞둔 경제학과 사람들 뿐이라서 오히려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불안하다. 학교에 매일같이 나가면서 연구 진도가 확확 나간다면 내 생활에 확신이 생길 텐데, 요즘은 교수님이 주신 과제 공부하고 영어 공부하기에도 바쁘다.


  영어공부는 gre 공부할 때를 제외하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ㅋㅋㅋㅋㅋㅋ열심히 하고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수능 준비할 때나 대학교 1학년 때 토익 공부할 때나 gre 공부할 때나 토플 공부할 때나 영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던 시기가 몇 번이나 있었는데, 미국에 와서 내가 정말로 공부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뭐가 부족한지를 파악하고 공부의 방향을 잡아서 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매일 30분씩 책 필사를 하고 나서 모르는 단어와 표현을 정리하고, 문법책(grammar in use advanced) 챕터 두 개씩 공부하고 또 다른 영어책을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와 표현을 정리한다. 그리고 나서 CNN 10을 두 번 듣고 script를 보면서 모르는 단어와 표현을 정리하고 다시 들은 다음 스크립트를 소리내서 읽는다. 드라마 보면서 단어와 표현 정리하는 것은 주말에만 한다. 말하기 연습도 좀 더 해야 할 것 같지만 일단은 머릿속에 단어와 표현을 채우는 것이 우선인 것 같아서 이 정도로 하고 있다. 사실 이것만 매일 해도 정말 벅차다. 이 시간 만큼 연구에 시간을 들일 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그렇지만 내가 원어민이 되어서 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해도 온전히 연구에만 쓸 리는 없으니 억울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기숙사에서 사람들이 많이 나가면서 아주 조용하고 좋다. 윗집에는 새벽에 가구 조립을 하기도 하고 늘 의자를 질질 끌고 다니며 한 번은 여행가면서 개만 혼자 방에 두고 가서 같은 건물 사람들 전부를 열 받게 하던 사람이 살고 있었고 옆집에는 새벽 세 시까지도 자기 친구들과 파티를 벌이는 인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전부 나가니까 너무 좋다. 6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는 새로 입사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될 거다. 그런데 아까 오후부터 위층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린다. 뭐지......


  요즘 내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졸업 후의 진로, 최종적으로 정착하게 될 곳, 가족들과의 거리, 언제 할지 모르는 결혼, 기타 등등. 물론 이런 것들을 생각하느라 골머리 썩힐 만큼 현재 상황이 한가하지는 않다. 이번 방학의 내 목표는 1) revision 받은 논문 수정해서 재제출 2) 연구 제안서 교수님께 드리고 개강하자마자 드래프트 제출 3) 조교 영어시험 통과 등이라서 당장 보이지도 않는 먼 미래를 고민할 시간이 별로 없다. 차라리 딴 생각할 여유 없이 바빠서 다행이다.



방학하자마자 만든 돈까스



월요일에 내 방에서 찍은 풍경. 주차장에 차가 없다.



화요일에 만들어 먹은 팽이버섯전


  아 잊어버리고 안 쓸 뻔했다. 목요일에 모처럼 일찍 일어난 김에 학교 보건소 가서 menB(Trumenba Meningococcal Group B) 접종 받고 왔다. 작년 11월에 1차 접종을 하고 6개월이 지나서 2차 접종을 한 거다. 한국에서 맞은 수막구균 접종은 학교 보건 포털에 검색해 보니까 MENINGOCOCCAL - QUADRAVALENT 이라고 되어 있는데 뭔지 모르겠고 보건소에 계시던 간호사 선생님이 menB가 더 좋은 거라고 하셔서 추가로 더 맞았다. 학교 보험으로 실비 처리 돼서 1, 2차 모두 무료로 맞았다. 주사를 맞고 나서 간호사 선생님이 주사 놓은 자리를 못 찾으시기에 불안했었는데 저녁 때 집에 와 보니까 부어오른 자리와 반창고가 붙어있는 자리가 달랐다^^^^^^물론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제까지 사흘 동안 팔이 뻐근하고 두통이 심했는데 오늘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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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학 시작한지 2주가 넘었다. 학기 중보다 시간이 더 안 가는 것 같다. 그렇게 느끼게 된 건 순전히 심심해서다. 학기 중엔 동기랑 맨날 붙어다니고 연구실에서도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피스메이트랑 긴 시간을 같이 있었는데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둘다 실종이라도 된 것처럼 학교에 오지를 않는다.  아무리 내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고 해도 2주 동안 사람과의 대화 한 마디도 못 하는 것은 가혹하다. 오죽하면 그 두 사람한테 제발 학교에 와 달라고 이메일을 보내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까. 다행스럽게도 오피스메이트는 목요일부터 학교에 오기 시작했다! 주말에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아서 목요일, 금요일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를 보자마자 지나치게 반가워했던 것 같다.




2.


  날씨가 너무 오락가락한다. 그저께까지 29도, 30도 정도로 덥더니 비가 오고 나서 갑자기 추워져서 어제는 긴 옷을 입고 나가야 했고, 오늘은 또 낮 기온이 15도 정도이기에 긴 후드티를 입고 연구실에 갔다가 저녁 6시 반쯤 밖에 나오니까 26도로 후텁지근했다. 처음엔 핸드폰 날씨 어플이 잘못 된 것인 줄 알았다. 집에 가면 또 얼마나 덥고 습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창문을 닫아놓고 나와서 아침 기온 정도로 서늘해서 오늘도 에어컨을 켤 필요가 없을 것 같다.




3.


  요즘 부쩍 집밥에 물리기 시작했다(왠지 이렇게 시작하는 일기를 이전에도 썼던 것 같다).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하루에 한두 끼씩은 꼭 밖에서 사먹었는데 미국에 오고부터는 뭐 주말에 한 반찬을 일주일 내내 먹다 보니 그럴 만도 하다. 남들은 바빠서 밥을 사먹는다는데 난 바쁠 때는 불평없이 꾸역꾸역 잘 먹다가 정작 한가해지니까 외식을 하고 싶어한다. 이런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 5월 들어서 초밥 한 번 먹고(아마도 방학 시작 기념이라는 명목으로 먹었던 것 같다) 지난 주 일요일에 판다익스프레스에 한 번 갔었다. 판다익스프레스는 지금껏 딱 두 번 가봤는데 굉장히 달고 맵고 짠 맛이 딱 한국에서 외식할 때 먹는 맛이다. 다른 곳에 비하면 비교적 저렴한 편이지만 일주일치 장 보고 오는 게 40달러 안팎인 주제에 한 끼에 9달러가 넘는 음식을 자주 먹는 건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아예 냉동 오렌지 치킨을 사다놨다.


  생각해 보니까 방학 시작하고 스스로 한가하다는 착각에 빠져서 주말에 반찬을 부지런히 만들어놓은 적이 없어서 이렇게 된 것 것 같다. 학기 중에는 아무리 바빠도 일요일엔 새벽 두세 시까지 찌개 끓이고 잡채 만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 방학 시작하고 나서는 밥을 미리 지어놓을 생각도 안 하고, 먹을 때 되면 새로 만들어 먹겠지 하고는 정작 손 많이 가는 음식은 안 하다 보니 반찬이 너무 부실하다. 부실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맛이 없다. 내일은 꼭 잡채랑 고구마맛탕이랑 된장찌개를 만들 거다.



4.


  방학이 시작되고 새로 목표를 세운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영어책을 필사하는 것이다. 그 전에도 단어 공부를 목적으로 책 몇 권을 읽긴 했지만 문장 하나하나를 직접 쓰면서 공부하다 보면 뭔가 다른 것을 더 배우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예전에 <App generation>을 읽을 때도 책 전체에 쓰인 표현들이 다 좋아서 전부 외우고 싶다고 생각해서, 마찬가지로 좋은 책들을 계속 꾸준히 필사하다 보면 내 문장력도 그 정도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그런?? 그런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효과가 나타났다. 연구실에다 책이랑 단어장을 갖다 두고 매일 30분씩 필사하고 모르는 단어를 정리하는데, 굉장히 흥미로운 책이다 보니 학교에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날에도 필사를 하러 간다. 간 김에 다른 공부도 좀 더 하다 오게 되고 그러니 나 같은 게으름뱅이에게는 이 만큼 좋은 처방전이 따로 없다. 참고로 이 책은 <A natural history of the senses (written by Diane Ackerman)>이다. 4월 초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책을 한 번에 너무 많이 사버려서 4월 한 달을 곤궁하게 살았는데 이런 용도로 책을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8월까지 필사 끝내고 다시 읽어봐도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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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주 내내 엄청 바빴다. 화요일 자정까지 내는 숙제 때문에 금요일 밤부터 고생하고, 금요일 3시 15분 수업시간까지 내는 숙제 때문에 며칠동안 학교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다가 어제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겨우 해방되었다. 석사 때는 숙제가 많지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랑 공부나 숙제를 같이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동기랑 숙제를 같이 하지 않았다면 둘다 완전 망할 뻔해서 협업에 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1. 인테리어


  곧 블랙프라이데이라고 해서 어제 아마존에 딜 상품으로 올라온 것들을 보다가 갑자기 내 집이 너무 삭막하게 느껴졌다. 거실이나 부엌이나 침실이나, 장식품이라고 할 만한 것은 한국에서 가져온 그림 엽서들, 예쁜 사진들 몇 개, 셰드 수족관에서 산 해달 인형, 주토피아 닉 피규어(쓰고 보니까 완전 많은데?)가 전부다. 안 그래도 혼자 살기엔 넓은 편인데 가구는 하나도 장만하지 않고 처음부터 있던 6, 70년대 미국식 것들을 그대로 쓰면서 꾸민 흔적조차 없으니 말 그대로 단지 생존만을 위한 공간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취방 인테리어'를 검색해서 보다가 여기엔 집 가까운 데서 자취에 필요한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다이소같은 곳이나 무것운 것들을 완제품 형태로 집까지 무료배송해주는 온라인 쇼핑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유학생 인테리어'를 검색해보았다. 방 예쁘게 꾸며놓고 사는 사람들 많더라. 방 크기는 내 방보다 작은데 가구나 소품이나 하나같이 다 깨끗하고 예뻐서 부러웠다.


  하 근데 검색 막바지에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 방이 예뻐보이는 건 진짜 가구나 소품이 예뻐서 그렇기도 했지만 일단 정리정돈 상태가 훌륭하니 안 좋아보일 수가 없는 거였다. 그에 비하면 지금 내 집의 상태는......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은 쓸데없이 자질구레한 장식품 사다가 짐 늘릴 생각하지 말고 정리상자같은 거나 사서 깨끗하게 정리부터 하자는 거였다.



2. payless


  오늘 늦은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고 payless에 갔다. payless는 처음 혼자 가보는 거였는데 이건 내 나름대로 굉장히 합리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1) 월마트에 가지 않고 페이리스에 간 이유

- 신선한 식품을 사기에 월마트는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에

- 페이리스에 무, 대파, 생강 등 아시아 채소가 많아서

- 맥주 사러 갔다가 동기를 만나지 않기 위해서


2)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장을 보러 간 이유

- 맥주를 사러


3) 가까운 마켓에 안 가고 굳이 멀리까지 있는 페이리스에 간 이유

- 맥주를 사러


  결국 맥주가 그 험난한 길을 나서게 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 내가 사는 주에서는 일요일에는 술을 판매하지 않고, 술을 구입할 때는 반드시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맥주를 살 거면 무조건 토요일에 장을 보러 가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유들은 사연이 좀 복잡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가까운 가게에서 장을 보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멀리 있는 큰 마트에 가기로 한 이유 중 하나가 또 맥주다. 무슨 알콜중독자라도 되는 것처럼 썼지만 사실 일주일에 한 캔도 안 마신다. 가까운 가게의 채소가 상태가 좋긴 한데 지난 주까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여기엔 한국에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크래프트 맥주만 많다. 처음 사서 마셔본 건 하와이의 마우이 brewing company라는 곳에서 나온 6도짜리 맥주였는데 처음에는 워낙 맛이 강하고 알콜 도수도 높아서 잘 마시지 못 하다가 마지막 한 캔 남았을 때에야(6캔씩 묶음으로 된 것을 샀었다) 엄청 단 taffy 팝콘이랑만 어울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다음으로 샀던 것은 무슨 스카치 에일이었는데 알콜 도수가 8도로 아주 높은 편이어서 금요일에 저녁 먹으면서 한 캔을 마시면 꼭 초저녁에 잠들었다가 새벽 두세 시 쯤 깨서 다시는 사지 않기로 했다. 어제 겨우 마지막 한 캔을 다 마시고 어김없이 초저녁에 자다가 깨서 이젠 좀 큰 마트에서 유명한 맥주를 사다가 마셔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월마트에서 맥주를 사면 안 됐다. 10월 초에 혼자 월마트에 갔다가 우연히 동기를 만난 적이 있었다. 뭐 그때보다 지금은 더 친하니까 마트에서 만나도 훨씬 덜 어색하겠지만, 인도인인 이 친구에게 술을 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인도에서 여자가 술을 사면 대놓고 손가락질을 받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 착한 친구가 내가 술을 산다고 대놓고 욕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내가 고기를 먹는다는 것에도 충격을 받는데 술을 사는 것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걱정이 되었다. 여러모로 내 행동의 기준이 되는 친구다.


  아무튼 그래서 30분 걸려서 페이리스에 도착했다. 식료품은 확실히 페이리스가 좋지만 다양한 상품을 구경하기엔 월마트가 더 재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맥주를 살 수가 없었다. 알콜을 파는 곳에 이르러서야 여권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나중에 쓰겠지만 이게 결국엔 엄청 다행스런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것들을 보는데 어제 사기로 마음먹었던 정리상자는 보이지도 않아서 채소 엄청 사고, 쌀 4.5kg 사고, 우유 사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버스는 거의 30분에 한 번 꼴로 오니까 일찍 나서봐야 좋을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운 좋게도 화장품 정리함과 욕실 코너 장식장을 발견해서 얼른 집어왔다.


  체크아웃을 하고 카트를 반납하고 짐을 드는데 이럴 수가 그제야 내 계산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원래 생각은 물은 무거우니까 동네에서 사야지★였는데 우유도 동네에서 사야 했다. 우유 하프 갤런(1.89L)의 무게를 간과한 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고, 정리함과 장식장의 부피가 크다는 것을 뒤늦게 안 것이 또 하나의 실수였다. 짐을 들고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정류장까지 걸어가는데 너무 무거워서 걸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올 때는 우유가 들어있던 비닐봉지가 터져서 안에 있던 것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하필이면 오늘 풋볼 경기가 열리는 날이라서 사람이 많았는데, 경기장 앞에서 장식장이 든 봉지가 터져서 쏟아지는 바람에 지나가던 학부생 몇 명이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느낀 해방감이란......


  장 봐온 것을 전부 정리하고 물을 사러 동네 마트에 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배낭과 여권까지 챙겨서. 500ml 병 24개짜리 물을 카트에 넣고 맥주 있는 쪽으로 갔는데 처음으로 내가 그 동안 맥주를 샀던 코너에 'CRAFT BEER'라고 쓰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크래프트 맥주를 따로 구분한 것을 보면 일반 맥주도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캔 맥주는 전부 유명하지 않은 브랜드 아니면 버드와이저/버드라이트 24캔 묶음밖에 없었다(버드와이저 맛이 어떤지도 모르는데 그 무거운 24개를 사서 들고 올 수는 없지). 그런데 버드와이저 캔 옆에 마침 호가든과 스텔라 아르투아 병 6개들이 묶음이 보여서 얼른 스텔라를 집어왔다. 페이리스에서 원래 목적이었던 맥주를 사지는 못 했지만 결국에 맥주를 겟했다는 나름대로 괜찮은 결말이다.


  페이리스에서 올 때도, 동네에서 물과 맥주를 사서 들고 올 때도 개고생했지만 전부 잘 샀다. 잘 산 것 같다. 이번 주에 바빠서 요리를 거의 못 하는 바람에 지난 주에 장본 것들하고 오늘 사온 것들하고 하면 앞으로 2주 동안은 우유만 사오면 식료품 장을 더 안 봐도 될 것 같다.


  아 근데 결국 맥주는 못 마셨다. 병맥주를 샀으면 병따개를 같이 사왔어야 했는데 그걸 생각을 못 했다. 다음주에 우유 사러 갈 때 병따개도 같이 사와야겠다.



3. 볼링 포 콜럼바인(Bowling for Columbine)


  영어 때문에 고생하면서 가장 절실히 느낀 것은 내가 영어권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들을 잘 알지 못 한다는 거였다. GRE나 토플 공부하면서 외웠던 단어들이나 전공에서 많이 쓰는 단어/표현들은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사용할 만한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오피스 아워 때 학생들에게 문제를 푸는 것을 알려주는 것보다 동기나 다른 외국인 친구들과 영어로 일상 대화를 할 때 더 막히는 부분이 많다. 처음에는 드라마를 보려고 했다가 내가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transparent, veep 전부 한 편씩만 봤다), 영화를 보면서 단어와 표현을 공부하기로 했다. 아마존 비디오에서는 자막도 같이 나오니까 잘 안 들리는 부분이 있으면 자막을 보면 돼서 이 이상 좋은 것이 없었다.


  오늘 본 '볼링 포 콜럼바인'도 같은 이유에서 본 거였다. 이전에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감독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은 논쟁을 일으키는 것을 즐기고 어떤 이슈에 관한 비주류적 생각을 떠들썩하게 주장한다는 그런 부정적인 쪽이었다. 아마 마이클 무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이 '화씨 911'이 화제가 되었을 때라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본 이 영화는 굉장히 재치 넘치고, 직설적이고, 한편으로는 슬펐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신념에 있어서나 중요한 문제이지만 쉽게 입에 올리기 어려운 문제를 직접적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4. 택배


  8월 중순에 부모님이 우체국을 통해서 보내셨던 택배가 해운 사태 때문에 한 달 이상 한국에 묶여 있다가 이번 주 금요일에야 도착했다. 굉장히 기뻤다. 뿌듯했다. 찬장이 꽉꽉 찼다. 어떤 것들은 미국에도 다 있는 건데 몰라서 이것도 다 보내주세요 하고 말씀드렸던 것이 생각나서 우스웠다. 그리고 여기 와서 3개월 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살면서도 혼자 지내는 것에 적응이 되어서 어쩌면 난 처음부터 혼자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쓸쓸한 생각을 했었는데 택배를 받고 나니까 나도 가족이 있는 사람이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 그늘에서 살아왔다는 것이 기억났다. 앞으로 집에 더 자주 전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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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에는 워낙 숙제나 조교 업무 등 일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바람에 상태가 엄청 안 좋았다. 그러다보니 금요일에는 심지어 동기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어서 세 번이나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었다. 내가 영어를 잘 못 해서 그런가, 컨디션에 따라 영어가 유난히 잘 되는 날이 있고 전혀 안 되는 날이 있다. 어쨌든 그래서 금요일에는 12시가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서 주말 내내 잠을 충분히 자면서, 심지어 낮잠까지 몇 시간씩 자면서 휴식을 취했다. 물론 이번 주에 더 큰 규모(?)의 숙제를 두 개나 더 내야 해서 이번 주도 지난 주와 비슷할 것 같다.


  나와서 산지 석 달이 넘어가면서 가족들하고 살 때는 느끼지 못 했던 소소한 즐거움들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다. 살림에 관해서는 주로 음식이 잘 됐거나 새로운 조리법을 스스로 터득했을 때 그런 즐거움을 느낀다. 3주 전이었나, 수도꼭지 필터를 갈았더니 난데없이 그 동안 수압이 약해서 조금씩밖에 나오지 않던 수돗물이 콸콸콸콸 잘 나오기 시작했다. 난 아무것도 안 하고 필터만 갈았을 뿐인데...? 아무튼 굉장히 놀랍고 행복했다.


  금요일에는 장을 보러 갔다가 Barley라는 곡물을 사왔다. 생긴 것을 보고 현미인 줄 알고 밥할 때 넣어서 먹으려고 샀다(방금 사전을 찾아보니 현미가 아니라 보리라고 한다). 여기 와서는 계속 검은 쌀과 노란색 퀴노아를 넣고 밥을 해서 한 번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밥이 달다. 보리를 안 불린 상태에서 밥을 해서 그런가 약간, 아주 조금 딱딱한 느낌이 있긴 한데 거슬릴 정도는 아니고 기대한 것 이상으로 밥이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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